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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으로 인하여 당분간 글쓰기를 쉽니다.

by 샤방샤방 | 2009/07/03 23:33 | 트랙백 | 덧글(1)

'듣보잡' 현상과 진보의 위기

광장의 열기를 일상에서 견고하게 만들어야

"혹시 인원이 적으면 어떡하지, 경찰은 차벽을 쌓았을까,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지난 6월 10일 저녁, 2호선을 타고서 서울시청으로 향한 길에 오만가지 걱정을 했던 필자의 다급함은 서울시청에 도착해서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보고서는 이내 사라졌다. 여전히 시민들은 작년의 촛불을, 1987년의 눈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달라진 점도 있었다. 지난해 촛불집회의 동기가 '미친 소'라는 의제가 압도적이었다면, 올해 6·10 집회에서는 현 정권을 겨냥한 총체적인 비판과 더불어 쌍용자동차, 한국예술종합학교, 용산 참사, 대운하, 광장 조례 등의 다양한 의제들이 광장과 거리에서 공존하였다.

흥겨운 집회의 공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밤 11시가 지나 야당 의원들이 빠져나가면서 경찰들이 서울광장과 도로에 있었던 시민을 삽시간에 도로 밖으로 내몰았다. 추측컨대 작년 촛불 집회의 학습 효과로 경찰국가 한국의 경찰들은 시가지에서 사회운동을 저지하는 반복 훈련을 받았던 거 같다. 만약에 이날 집회 참여 인원이 작년 6월 10일처럼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촛불로 가득 찼더라면 경찰들의 진압 작전이 수월하게 진행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인원에 대한 아쉬움이 남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논쟁적인 반문을 던질 수 있다.

"더 많은 인원이 모였다고 하자. 그래서? 그래서 뭐가 해결되는데?"

시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선천성 난청증 걸린 현 정권과 소통하길 원하는 시민들은 벽에 부닥치고 있다. 그렇다고 거리의 정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광장과 거리에서 시민들은 쌍용자동차, 운하, 용산 참사 등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다양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이 소통의 공간은 정당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설 수 있는 급진적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는 훌륭한 토양으로 일궈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광장에서의 소통의 열기를 어떻게 "광장", "거리"라는 제한된 지리적 규모를 넘어서 어떻게 현 정권의 '소통 불가능성의 지속 가능성'을 제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가다. 앞으로도 현 정권의 임기가 끝날 때 까지 막차를 놓치는 불편함과 다음 날의 피곤함이 반복되겠지만 광장과 거리의 정치는 지속될 것이고 지속되어야한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앞서 반문했던 "그래서?"로 돌아가 보자. '집회 그래서 집회 그래서 집회 그래서…'의 순환 고리가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전략인가?

광장의 한복판에서 목청을 높이다가, 순식간에 덕수궁 앞 인도 앞에서 로보캅 복장을 한 전경들을 멍하게 마주하게 되면서 무기력함을 느낀 것은 비단 필자뿐일까?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견고한 것들은 대기 중으로 사라진다"는 시적인 문구를 남긴 바 있다.

이 문장은 혁명을 통하여 지배 계급(견고한 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서 복잡해진 정치·사회 구조 속에 놓여 있는 우리들에게 이 문장은 지배 계급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해 던져진 물음표이기도 하다. "광장의 열기를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견고하게 할 것인가?"

▲ 6월 10일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는 쌍용차, 용산 참사, 운하 등 갖가지 사회 의제를 놓고 온갖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런 광장의 열기를 어떻게 공고화할 것인가? ⓒ황진태

'듣보잡' 현상의 교훈?

'듣보잡'이라는 인터넷에서 떠도는 용어가 짐짓 인터넷과 멀어 보이는 교수의 입에서 나올 정도로 일상용어가 되었다. 인터넷 국어사전에 따르면 '듣보잡'은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을 일컫는다. 이 용어의 확산 원인은 진중권과 변희재 간의 논쟁에서 진중권이 변희재를 '듣보잡'이라고 딱지를 붙이면서 확산되었다. 그간 공개적으로 변희재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게 껄끄러워 구경만 하고 있었지만, 이번 '듣보잡' 현상은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현재 수많은 보수단체의 완장을 차고 있는 변희재는 사실 '듣보잡'이라고 하기에는 인터넷 토론 바닥에서는 유명한 논객이었다. 1990년대 후반 논객사관학교로 알려져 있던 <대자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인물과사상사에서 대중문화 관련 서적을 출간했었다. 2002년 대선 기간 동안에는 당시 노무현 후보의 진지였던 인터넷 토론 사이트 <서프라이즈>의 필진으로 활동하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촉망받는 논객으로 주목받았었다.

이후 노무현 정권에 대한 의견이 갈리면서 <서프라이즈>를 나와서 <시대소리>를 창간했었다. 필자 또한 2003년부터 <대자보>와 <시대소리>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대자보> 사무실에서 변희재를 가끔 만났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이후 변희재는 안티조선 논객에서 조선일보 논객으로의 변신을 하였다.

변희재의 전향에서 대해서 그간 언급할 기회가 없었지만, 예전부터 그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한 바로는 논객으로서 변희재는 이념적 토대에 근거하기 보다는 각각의 상황에 적합한 맥락들을 빠른 시간 안에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이슈화하는데 재능이 있는 감각적인 글쓰기에 능한 인물이다.

변희재의 이슈화를 위한 감각적 글쓰기가 이념적 토대에서 벗어나서 '변희재' 그 자체를 이슈화하고자 나서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그는 포털 공격,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 등등으로 종횡무진 '감각적 활동'에 나서며 변신에 성공했다.

갑자기 광장의 정치를 이야기 할 참에 왜 변희재를 끄집어냈냐며 반감이 생길 독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인 부분은 잠시 제쳐두고, 이 글에서는 이 두 고리가 서로 연결된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시작해서 이슈 제기에 능했던 진보진영의 한 젊은 논객이 하루아침에 보수 그것도 극우매체의 논객이 된 사건을 개인 하나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변희재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아야 할 질문이겠지만 변희재의 '감각적 활동'을 통해 얻은 수많은 완장들은 역으로 그 많은 완장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도 된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깨놓고 말해서 진중권과 같은 예외적인 스타 논객을 제외하고는 이 바닥에 있는 글쟁이들은 생계 문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평소 진보진영이 대안이 없다고 쉽게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과 함께 진보진영에서 정책을 구상하고, 대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했는가에 대해서 필자는 시민사회 차원에서 그러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었다고 생각한다.

변희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감각적 활동'을 추구했다고 말할 가능성이 높지만 내 생각에 그가 했던 매체 중에 어느 하나라도 수익 창출을 이끌어 냈다면 그 정도의 초월적 행보는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예측한다. 변희재와 같은 사회의제에 포괄적이면서 의제 포착 능력이 뛰어난 논객들이 활동할 수 있는 안정적인 매체가 있고, 사회의 중요한 이슈별로 전문분야를 전공한 소장학자들에 대한 안정적인 연구 공간이 마련된다면 진보 진영의 정책 역량은 상당히 강화될 것이다. 언제까지 진보매체들도 예외적 천재인 진중권의 '입' 하나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창피하기도 하지만 이는 필자에게도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이야기다. 2003년 <대자보>에서 시작해서 지금껏 여러 매체에서 글을 쓰고 있지만, 이러한 활동이 딱히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거의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현재 필자의 나이 스물여덟. 88만원 세대, 실업자 범주에 잡히지도 않는 일개 대학원생이다.

미국에서 대학원생은 극빈층에 속한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고작 할 줄 아는 것은 글을 읽고, 쓰는 것 밖에 없다. 시민단체에 한 푼이나마 회원으로 가입하여 돈을 매달 낼 능력도 못돼서, 글이나 쓰면서 대운하를 비판하고, 서울시정을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글을 쓸 때 소속으로 밝히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객원연구원이란 직함은 어디까지나 '객원'이고, 연구소로부터 그 어떤 물적 지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본적인 연구원이 지향하는 바에 동감하고, 미약하나마 직함으로 연구소를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회비 대신에 글로써 회비를 내는 꼴이다.

그간 필자가 <프레시안>과 다른 매체에서 실명을 언급하면서 운하와 함께 현 정권을 비판한 글들과 논문이 앞으로 학계에서 학자로서의 미래에 얼마나 장애물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무현이든 이명박 정권이든 그 시대를 안고 가는 사람으로서 소박한 책임감으로 마땅히 펜을 들 뿐이다. 한 줌도 안 되는 20대 논객인 아흐리만 한윤형과 김현진이 그러하며, 정권을 가리지 않고 날카로운 필봉을 겨누고 있는 <프레시안> 기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속 시원하면 그걸로 "땡!"인가?

위기의 희망제작소는 진보진영의 위기를 가리킨다

소장학자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공통적으로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내 후배들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적은 월급이라도 주면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다."

이 말은 결코 낭만적인 빈말이 아니다. 그간 대운하 비판을 하면서 알려진 필자한테도 6월 10일 아침에 한 선배가 국토연구원에서 경인운하 프로젝트에서 GIS(지리 정보 시스템) 관련 1년짜리 위촉연구원을 뽑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문자를 보내 왔었다. 운하 비판을 해왔던 나까지도 그 운하 프로젝트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누구든 '듣보잡'이 될 수 있는 덫 아래 놓여있다. 절묘하게도 어제 시청 앞 거리에서 녹색연합이 만든 경인운하 반대 현수막을 보면서 요즘 개그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유행어가 떠올랐다.

"이거 왠지 씁쓸하구먼…"

6월 3일 <경향신문>에는 위기의 '희망제작소'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지역 활성화와 소기업 발전 운동에 앞장선 시민참여 연구소 '희망제작소'가 위기에 처했다. 창립 3년째를 맞은 올해 들어 정부와 기업의 협력 사업이 잇따라 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 2000여 명의 개인 후원으로 단체를 꾸려가고 있지만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어려운 형편이 됐다. 이 때문에 희망제작소는 지난 4월말 사무실을 종로구 수송동에서 평창동으로 이전했다. 월세 부담금을 절반쯤 줄인 것이다. 또 지난해 말쯤부터 전체 인력의 절반에 달하는 40여 명의 연구원이 희망 퇴직이나 휴직을 하는 방식으로 연구소를 떠났다."

대표적인 민간연구소인 희망제작소의 사정이 녹록치 않은 지경이 되었다. 박원순 변호사라는 시민운동 최고의 브랜드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개인 후원이 2000여 명에 불과하다니 나머지 민간연구소 사정은 말할 것도 없겠다. 희망제작소는 설립 초기에 삼성으로부터의 후원을 받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치른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비판과 더불어 이 연구소가 재벌의 지원을 받지 않더라도 운영이 가능하도록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의외로 해답은 간단하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은 10명의 회원이 1명의 연구원을 책임진다는 시스템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러한 운영방식을 상기한다면 결국 국가, 재벌 등의 지배 세력들로부터 독립적인 정책과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돈으로 연구소의 물적 토대를 만드는 모순에서 벗어나서 자립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필자가 너무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냈는가?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하고서 진보진영은 대안이 없다는 비판은 비판이기보다는 비난에 가깝다. 처음에 던졌던 화두를 다시 꺼내보자.

"광장의 열기를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 견고하게 할 것인가?"

광장의 정치를 우리만의 축제로 끝날 게 아니라 난청증에 걸려 있는 현 정권의 견고함을 대기 중으로 증발시키고자 한다면, 광장의 열기를 사라지지 않고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견고하게 하는 실천도 병행되어야만 한다. 현재로서는 변희재와 같은 사례를 '듣보잡'이라고 희화하하며 예외적인 사례로 단정할 수 있겠지만 지금도 주변에서는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 친구들이 자신의 포부와 무관하게 생계를 이유로 변경하려는 침묵하는 '듣보잡'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아니 운하를 강하게 비판한 필자조차 운하 관련 프로젝트에 위촉으로 들어갈 당의정의 유혹을 받고 있지 않은가!

6월 10일의 집회에서 경찰들로 인하여 광장의 의사소통 공간이 일순간에 사라지면서 느꼈을 허무함과 무기력함을 어깨에 지고서 집으로 돌아간 시민이라면 시민단체나 민간연구소에 회원 가입을 하여 회비를 지원하든 인터넷신문에 자발적 구독료를 냄으로써 그러한 허무함을 이겨냄으로써 먼 길이겠지만 하나의 대안을 찾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촉망받던 한 젊은 논객의 전향은 진보진영에게 희극에 가까운 비극이다. 하지만 광장을 넘어서 일상적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희극조차 허락되지 않는 철저한 비극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다. '듣보잡' 현상이 한국 사회에 던져주는 교훈이다.

/황진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객원연구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프레시안 6월 12일자에 기고한 글입니다.

by 샤방샤방 | 2009/06/12 21:23 | 사회 | 트랙백 | 덧글(0)

<알림> 공간환경학회 2009 춘계학술대회

공간환경학회 2009 춘계학술대회 프로그램

 

일시: 2009년 5월 23일(토). 오후 1~ 6시30

장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정보관(10-1) 308

 

일정

 

참가등록                                                   12:30 ~ 13:00

 

개회                                                         13:00 ~ 13:20

-         사회:            학술위원장 박배균 교수 (서울대)

-         인사말:          학회장 박경 교수 (목원대)

 

1분과: 기후변화와 공간환경                            13:20 ~ 14:50

1)     기후변화 거버넌스의 사회구성적 접근: 사례분석을 중심으로

-         발표: 이상헌 (한신대 교수)

2)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정치생태학적 접근-자연의 생산과 탈취에 의한 축적을 중심으로

-         발표: 황성원 (서울대 석사과정)

3)     기후변화와 도시재생

-         발표: 김용창 (서울대 교수)

 

휴식 (Tea Break)                                          14:50 ~ 15:00

 

2분과: 60, 70년대 개발연대기의 국가공간           15:00 ~ 16:00

1)     개발연대 시기의 대도시 통치성 연구: 대규모 아파트 단지 개발을 중심으로

-         발표: 임동근 (파리7대학 박사과정)

2)     1960년대 광주의 영역동맹의 스케일전략: 호남지역주의의 형성과정

-         발표: 김동완 (경원대 강사)

휴식 (Tea Break)                                          16:00 ~ 16:10

 

 

3분과: 일반 논문 발표                                  16:10 ~ 18:10

1)     Housing Right from the Perspective of Human Rights: The Shift of Human Rights Framework

-         발표: 고은태 (중부대 교수)

2)     생협 유기농 생산자 조직의 생산-소비관계 변화: 홍성 풀무생협 사례 연구

-         발표: 허남혁 (대구대 박사과정)

3)     지역경제발전을 위한 기업유지정책의 효과에 관한 연구

-         발표: 정규진 (성균관대 석사)

4)     발전국가 측면에서의 동아시아 세계도시 연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프로젝트

-         발표: 황진태 (서울대 석사과정)

 

페회                                                         18:10 ~ 18:20

식사 및 뒷풀이                                           18:40 ~

 


by 샤방샤방 | 2009/05/18 09:01 | 공간+지리 | 트랙백 | 덧글(0)

뇌물 먹은 양윤재를 다시 장관급으로

뇌물 먹은 양윤재를 다시 장관급으로

미필적 악의적 서평을 쓰게 만든 원인은?

용산참사 이후 국익을 재물로 바친 제2롯데월드 건설허가, 용산개발이 다시 꿈틀거리는 등, 서울은 자본이 원하는 공간으로 편성되어 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공간에서 살고 있는 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현재 진행 중인 서울의 막돼먹은 돈먹고 돈먹기식 공간 전략을 제지할 수는 없는 걸까?

최근에 출간된 건축역사가 스피로 코스토프의 <역사로 본 도시의 모습>(2009, 공간사)을 읽으면서 알게 된 샌프란시스코 사례는 필자의 의도가 한갓 낭만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수단 좋은 정치가들과 개발업자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주의자들이 벌인 정치적 선전운동은 1985년 가을, 도시중심지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통과시켰다. 그 계획은 구시대의 고층 건물들을 포함하여 많은 랜드마크를 허물지 못하게 했다. 과밀한 금융지구부터 새로 지어지는 사무용 고층 건물을 금지했고, 1년에 지을 수 있는 실질적인 건물의 수를 제한하는 규제를 추가했다. 이를테면 ‘성장제한growth cap'이라는 것이다.”

이 문장들은 현재 세계도시 서울을 만들기 위하여 활발하게 추진 중인 서울시의 도심재개발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수단 좋은 정치가들과 개발업자들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서울이야말로 ‘성장제한’이 필요하다.

상당히 두터운 원서를 부지런하게 옮겨놓은 번역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와 같은 정치가들과 개발업자들로부터 운동을 통해서 성장제한을 쟁취할 불순한 의도에서 번역했을까? 80년대 녹두나 백의와 같은 인문사회과학출판사들에서 번역된 책들은 단순히 외국어를 한글로 옮긴 게 아니라 이러한 실천적 고민이 반영되었던 것을 회상한다면 그러한 심증은 더욱 강해졌다. 이명박식 법치시대에 이러한 불순분자를 이명박 정부가 과연 용인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된다.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이 책이 우리나라의 건축과 도시계획, 조경 및 도시설계 관련 학자와 연구자, 학생과 실무에 종사하는 전문가, 그리고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을 좀 더 정확히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우리의 도시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가는데 도움이 되고, 나아가 이 분야의 연구자들과 전문가들의 실무에도 보탬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막상 책을 번역해 놓고 보니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최근에 출간한 자신의 책이 주목받게 되면서 각종 강연회가 잡혔었다가 노무현 전대통령을 둘러싼 부패사건이 터지면서 ‘정치적 경호실장’ 유시민으로서 강연회 일정을 취소하고 활동을 자중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는 유시민의 이러한 행보를 두고서 참여정부의 도덕성이 아직 남아 있다면서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직접적으로 부패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으로서 유시민은 최소한의 ‘염치’는 갖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싶었을 뿐이다.

여기까지 읽으면서 이 글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아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거 같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앞서 소개한 책의 번역자를 소개할 필요가 있다. 책에 적혀 있는 약력을 그대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학과. 미국 일리노이공대 대학원, 하버드 대학 설계대학원에 건축과 도시계획, 조경 및 도시설계를 공부했다. 이후, 미국의 S.O.M에서 건축과 도시설계 실무를 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환경대학원과 건축학과에서 도시설계를 가르쳐 왔으며, 미국 워싱턴 대학 교환교수, 서울시 청계천복원사업본부장과 행정2부시장을 역임했다.”

이 책은 2009년 1월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번역자의 이력은 행정2부시장을 끝으로 그 이후가 생략이 되어서 아래와 같이 친절한 보충이 필요하다.

부정부패로 구속된 자도 장관급으로 임명하는 이명박 정부의 윤리성

번역자인 양윤재는 지난 2003년 청계천복원사업본부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청계천 주변 재개발과 관련하여 개발업자로부터 층고제한을 완화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2억 원을 받는 등의 총 4억 원의 뇌물을 받아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기소되었고, 징역 5년형을 받았다가 이명박 대통령의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지난해 풀려났다. 그리고 넉 달 후에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관급 대우)으로 임명되었다.

유시민의 ‘염치’가 이명박 정부에서 얼마나 절실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랜만에 상기해보자면 청계천 복원사업은 자그마치 3800억 원에 달하는 서울시민의 혈세가 들어간 엄연한 공공사업이었다.

그런데 양윤재는 개발업자로부터 4억에 달하는 뇌물을 받아먹는 사익행위를 통해서 감옥에 들어갔던 사람인데 남아있던 징역을 마저 살지는 않고, 태연하게 장관급 대우를 받는 공직으로 화려한 컴백을 하였다. 이렇게 얼굴에 철판으로 코팅한 행보가 정녕 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에 걸 맞는 품위를 지킨 것인가.

한국사회 상위 지도층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상류층의 도덕적 책무)는 증발된 지 오래고, 그 아래 계층에서는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배회하고 있다.

현재 검찰이 수사 중인 죽어있는 권력에 대한 조사는 살아있는 권력에의 부정부패에도 똑같이 적용할 것인지도 지켜보아야 할 것이지만, 양윤재와 같은 인물이 현 정권에서 태연자약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현 정권이 ‘윤리’라는 단어를 과연 알고 있는지도 의구심이 든다.

다시 강조해서, 누구보다도 양윤재는 청계천 복원과정에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행동대장으로 앞장서 시민단체의 의견을 묵살하고, 시공을 앞당겨서 청계천을 복원 아닌 왜곡을 초래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청계천 사업과정에서 수단 좋은 정치가들과 개발업자들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뇌물을 받아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렇게 뻔뻔하게 “우리가 사는 도시의 모습을 좀 더 정확히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고, “막상 책을 번역해 놓고 보니 부족한 점이 너무 많아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양윤재는 자신이 다음의 335쪽을 번역하면서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그들이 사는 도시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람은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야하는 시민들이다. … 만약 우리가 도시라는 공동체가 우리의 가치를 품어주고, 우리가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자리를 우리에게 마련해준다면, 도시를 설계하는 방향을 정하는 일은 우리들이 함께 책임을 질 것이다.”

만약 ‘염치 있는’ 양윤재였다면 속죄하는 마음으로 쓰다만 약력에 자신의 뇌물혐의로 구속되고, 정권의 은총으로 장관급 대우를 받는 감투를 받았다고 밝혔을 것이다. 그리고 옮긴이의 글에서 ‘생계 때문에 막상 책을 번역해 놓고 보니 제가 뇌물 먹은 먹물이라서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썼을 것이다.

번역을 반역으로 만드는 번역자의 윤리성도 중요하다

덧붙여 번역서의 출판사가 공간사였던 것도 씁쓸하다.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역사에서 양대 산맥인 김수근의 주도로 1960년에 창립한 이래로 공간그룹은 일개 건축사무소가 아니라 월간 <공간>을 통해서 근 반세기동안 한국건축역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공간>을 중심으로 당대의 건축담론논쟁을 주도했었던 공간그룹의 역사를 감안할 때 최소한 지식인으로서 절필 사유인 공공사업에서 뇌물로 구속된 자를 왜 하필 오랜만에 공간에서 출간된 훌륭한 원서의 번역자로서 마주쳐야 했는지는 오랜 독자로서 씁쓸할 뿐이다. 질 좋은 양서에 대한 번역자의 비윤리성이 번역을 반역으로 만들게 되었다. 이 서평이 첨이자 마지막으로 곤혹스러운 서평이길 바란다.

참여정부의 부패사건이 민주화 세대들에게 절망이었다면, 이명박 정부에서 버젓이 부패를 저지르고도 염치를 모르는 먹물이 한국사회를 얼룩지게 하는 것은 온 국민의 절망이다. 그나마 아주 최소한 양윤재의 미덕은 “도시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람은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야하는 시민들이다”라는 역설적인 번역문을 한글로 유포시킨 점이다.

시민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져가고 있는 용산참사를 반추하여 도시의 모습을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사람이 바로 우리라는 자각이 필요할 때다.

2009년 05월 08일 (금) 12:02:58황진태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객원연구원 redian@redian.org
레디앙에 기고한 글입니다.

by 샤방샤방 | 2009/05/08 12:40 | 사회 | 트랙백 | 덧글(2)

서평. 혁명을 표절하라

"니가 해라, 혁명"
[투고-서평] 『혁명을 표절하라』…세상을 바꾸는 18가지 즐거운 상상

  
  ▲표지.
작년 이맘때쯤 서울 광화문 청계천 광장 한 구석에서부터 촛불들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6월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으로 촛불이 넘실거렸다.

당시의 촛불집회는 제2의 86년 항쟁이라고 평가될 정도로 시민들의 역동적인 힘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컨테이너로 쌓아올린 명박산성처럼 촛불의 함성을 들을 줄 몰랐던 이명박 정부의 난청 때문에 이내 급속도로 촛불들은 사그라졌다.

촛불 이후의 방법론

촛불운동은 광우병 등의 소비와 관련된 부르주아적 운동의 한계라는 뻐근한 평가도 있었지만,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서 그 대안으로 직접 민주주의 논쟁이 점화되고, 전통적인 운동의 엄격성에서 벗어나 놀이, 축제와 같은 다채로운 운동의 빛깔이 번지면서 한국사회운동에 새로운 좌표들을 설정했다는 점에서는 소중한 수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수확물을 어떻게 다시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어서, 신자유주의,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마치 한 밤중 정전이 되었을 때 촛불의 소중함을 인식하다가도 이내 전기가 들어와서 형광등이 켜지고 나면 촛불의 고마움은 금방 잊혀졌듯이, 촛불의 활력을 끄지 않고서 키워나가는 것은 불가능할까?

『혁명을 표절하라-세상을 바꾸는 18가지 즐거운 상상』(트래피즈 컬렉티브 엮음, 황성원 옮김, 2009, 이후)은 촛불이 꺼진 후의 곤혹스러움을 대비할 수 있는 일말의 방법을 제시해 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경제 제도에 저항하는 대중 운동이 시애틀에서 멕시코 칸쿤에 이르기까지 탄환처럼 날카롭게 날아서, 현수막과 최루가스, 폭동의 현장을 넘나들었지만, 거리가 다시 조용해졌을 때 일상의 사람들은 또 다른 가능한 세상의 벽돌을 상상하고, 만들고, 실천을 통해 학습하면서 비범한 일들을 행하고 있다.”(20쪽)

Do It Yourself

이 책의 저자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명시적으로 저자는 세 명이지만, 책에 소개된 각종 전술(?)과 내용들은 전 세계의 아나키스트들과 반세계화 단체들의 노하우를 모아놓은 것이다. 책의 원제는 DIY(Do It Yourself), 즉, ‘너 스스로 하라’라는 의미인데, ‘DIY’라는 용어는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흔한 용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대한민국 주부들이 살림을 할 때 직접 일상에서 손으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해서, 이제는 여러 분야에서 DIY 용어는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책에서 사용한 DIY도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

저자들은 혁명 또는 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지나가고 돌아온 일상에서 어떻게 또 다른 가능한 세상의 벽돌을 상상하고, 만들고, 실천하여, 혁명을 지속시킬 수 있는가를 바로 그 일상생활에서의 DIY를 통해서 주장한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이론과 실천으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정부나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자 하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우리 손으로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너무 시시콜콜하게도 전기를 자급하는 방법부터 의사결정에 합의를 이루게 하는 방식, 병원 없이도 건강을 지키는 법, 학교 없는 교육, 먹을거리 등의 자조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방식부터 시작하여 국가기구와 자본에 빼앗긴 각종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대안언론, 직접행동의 방법과 사례들까지 망라하고 있다.

가령, 화석연류, 중앙 집중화된 전력망에 의지하여 온수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대안으로 태양열 온수 샤워기의 제조법을 상세히 설명해놓는가 하면, 도시의 오염물질을 줄이는 일환으로 사람의 대변을 간단한 저장시설을 만들어서 하수도 시설이 필요 없는 퇴비형 화장실을 만드는 제조법을 도면과 함께 다음과 같이 상세히 밝히고 있다.

싸움의 기술들

“퇴비형 화장실의 가장 일반적인 모델은 두 개의 지하 저장 시설을 가진 방식이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저장 시설들이 대안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방 한 개가 거의 차면 봉쇄되고(구멍 위에 판자를 얹어 막는다) 다른 방이 개방된다.

이 다른 방을 사용하는 동안 첫 번째 저장소에서 퇴비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온대기후에서는 적절한 퇴비화가 진행되는 데 보통 1년 정도면 충분하다. 저장 시설에는 뒤로 접근할 수 있는 문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만들어진 퇴비를 밖으로 끄집어낸다.

퇴비는 정말로 영양분이 풍부한 흙처럼 보이며, 냄새가 나지 않고 원래 그것이 어떤 물질이었는가에 대한 흔적이 전혀 없다. 만들어진 퇴비를 다 끄집어내고 난 뒤에 그 방은 다시 새로운 순환을 맞게 되며 적절한 때가 되면 지하 저장 시설의 용도가 바뀔 수도 있다.”(78-79쪽).

당장에 토건국가 한국에 쓸 만한 전략도 소개되어있다. 대처 총리가 집권하고 있었던 1980년대 영국에서는 대규모 도로 건설계획을 저지하고자 환경주의자들은 저항캠프를 만들어서 다음과 같은 직접행동을 했었다.

“저항 캠프는 어떤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 진행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캠프는 굴착기 밀어 떨어뜨리기부터 하청 업자 사무실 점거하기에 이르는 행동 기지의 역할을 한다. 캠프에서 먹고 자는 사람들은 꾸준히 다른 사람들이 관련 사안과 저항에 대해 상기할 수 있는 시각적 자료들을 제공하면서 사람들이 해당 지역에서 참여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고양시킨다.”(429쪽)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영국정부가 도로 건설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직접행동을 통해서 말귀를 알아듣는 영국에 비해서 이명박 정부의 토건지향적 정책들에 대한 대응전략으로 이런 것들(굴착기 밀어 떨어뜨리기)을 사용한다면 법치정부에서 어떤 결과를 나올지는 미지수겠다.

일상의 실천과 구조 변화

이 밖에도 빈집 점거를 위해서 자물쇠를 바꾸는 법을 도면까지 친절히 그려서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일상에서의 전략들은 단순히 독자의 흥미를 노리고서 쓴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얘기들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는 있는가라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퇴비형 화장실 제조법만 보더라도 기후변화로 인한 물 부족 현상의 심화에 대한 대안으로, 풍력을 이용한 극소형 발전시설이나, 태양열을 이용한 온수 샤워기 등은 인류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인구가 여전히 전등을 켤 수 있는 전기 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붕괴 이후에 이러한 적정기술들을 통해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대안임을 저자들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자 했다.

이 밖에도 정당 민주정치의 한계에 대한 직접 민주주의를 위하여 합의를 이루기 위한 수레바퀴형 의사결정방식, 안전한 먹을거리를 공급받기 위하여 공동체 정원을 만드는 전략들은 무정부주의적 관점에서 자족적 공동체를 만들어서 국가를 대체할 대안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한계를 인정하고, 국가의 기능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전략들이겠다.

전후 프랑스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이자 철학자인 앙리 르페브르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일상에서의 실천을 강조했다가, 당대의 구조를 고민하고, 거시적인 변혁을 통해서만 혁명에 성공할 수 있다는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은 바 있다.

이는 한국에서도 비슷한 상황인 듯싶다. 87년 6월 항쟁 이후 20년이 흘러 제 2의 민주항쟁으로 불린 촛불운동까지 나아갔지만 현 정부는 녹록치가 않았다. 도리어 거대한 운동의 실패가 깊은 냉소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너무 쉬운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감도 있다.

빈집 점거 등의 사례를 한국사회에 직접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책에서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다양한 전술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실제로 실천해봄직한 내용들을 참고해도 좋겠다. 책의 제목처럼 이 안내서에서 소개한 혁명을 표절하여, 자신만의 DIY를 통해서 또 다른 가능한 세상의 벽돌을 한 장씩 쌓아올리는 유쾌한 실천들을 상상해본다.

2009년 04월 25일 (토) 08:07:34황진태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webmaster@redian.org
레디앙 기고문.

by 샤방샤방 | 2009/04/25 15:50 | 국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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