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7월 09일
송두율, 황장엽, 에미넴, 그리고 문화적 차이
| 송두율, 황장엽, 에미넴, 그리고 문화적 차이 | ||||||
| 한국의 율사들이여 오만한 사법관료주의에서 깨어나라! | ||||||
에미넴의 국적이 한국이었다면 얼마 전 미국 힙합가수인 에미넴이 “난 죽은 대통령들 때문에 노래하진 않아. 차라리 대통령이 죽는 것을 보았으면 해”라는 가사가 포함된 미발표곡이 인터넷상에 유포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백악관이 물론 한 줌의 뇌만을 갖고 있는 백악기 공룡들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닐 터. 대통령 비서실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 중이란다. 하지만 이후의 외신을 접했을 때 에미넴에게 사법적인 잣대를 드리 내밀고 있지는 않은 거 같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일까?
자본주의에 포섭된 국가보안법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작동되는 한국산 자본주의가 미국과의 기계적인 비교 속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 사례에서 보듯이 오산일 수도 있겠다. 송두율 교수를 사례를 보건 데 이 상황은 아무래도 ‘극과 극은 통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통하여 이해될 수 있겠다. 즉, 황장엽이 극구 주장하는 송두율은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극좌적 포지션보다는 사실은 ‘경계인’으로 극좌도 극우도 아닌 그의 애매모호한 포지션이 극좌인 황장엽에게 눈엣가시이며 극우인 조갑제의 눈에도 눈엣가시로 박힌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통일연대 민경우 사무처장의 구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엉뚱하게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를 향해서 칼날을 겨누고 있으며, 정작 ‘빨갱이’를 잡기는커녕 빨갱이를 보호하는 ‘빨갱이보안법’이다. 이러한 논리의 오류를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한국사회를 너무 좋게 보았던 송두율 교수
그나마 다음과 같이 한국사회가 “그물사회(network society)는 비록 아니지만, 적어도 통합적인 <국가>와 경쟁적인 <시장>사이에서 <제3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된 사회>”라고 보고 있는 시민사회에 대한 송교수의 낙관은 옳았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극우꼴통 시민단체마저 ‘조직된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교수의 지난 첫 공판 때 재판정에 보수꼴통단체 회원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송교수를 응원하러 온 상식적인 시민들은 정작 자리에 착석조차 못했던 일화에서 보듯이 그들의 ‘조직됨’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21세기 대한민국 율사들의 일제침략기 일제법령 체험 한국법학교수회 명예회장이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인 한상범 씨는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일단 대대적 법제개혁이 단행되었고 민주화의 이론작업도 어느 정도는 수순을 거쳤”던 반면에 정작 한국에선 “1948년 제정된 헌법100조는 구법령(일제법령과 미국의 군정법령)의 효력을 보장하는 근거 규정으로 헌법이나 정부조직법 이외에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주요 법령이 존속되고 미군정하의 친일관료도 대한민국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전체주의 습속의 망령이 깃든 법령을 패전 직후에 쫓았던 반면 한국은 아직까지도 일제의 패망 전 시대의 법령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으로 이름만 바뀌고 조항이 더 들어 간 사실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법이란 것은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그 무엇으로 '신(神)'마냥 아우라를 씌워버렸다. 이는 법전을 한문으로써 그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 했던 친일파 출신의 ‘법기술자’들이 큰 몫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들의 권력정당성은 뿌리가 없고 오로지 억압과 통제만이 그들의 불안정한 권력정당성을 유지시켜줬다. 그리고 그 토대는 물론 국가보안법이리라. 에미넴과 송두율, 문제는 문화적 차이다 서두에서 에미넴의 사례를 통해서 ‘문화적 차이’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러한 문화의 범주에는 ‘법문화적인 차이’도 포함된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의 외교정책에 딴지를 걸고 반미를 외치지만 미국 내에는 ‘국민이 통제하지 않으며 어떤 정부도 계속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등의 유명한 명언을 남겼으며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기도 한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성숙된 자유민주주의가 시민사회에 내재해 있다.(이 또한 미국이 ‘상대적’으로 한국보다야 낫다는 말이지 부시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아웃사이더 16호에 실린 김동춘 교수의 ‘미국의 미디어와 지식인’이란 글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이 결코 민주주의의 그 ‘이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도 흑인과 원주민을 시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은 논쟁적인 쟁점이 있다.) 12월 16일 화요일, 송 교수의 두번째 공판이 있다. 한국의 율사들이여. 당신들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오만한 사법관료주의와 구법규로부터 탈피하여 송교수 사건에 임하길 바란다. 기자는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라서 한상범 위원장이 당신들에게 하는 충고로 이글의 마무리를 짓는 것이 나을 거라 본다. “우리의 사법개혁은 특히 법조 양성 면에서 이 인권과 저항권부터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교육을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이다.법관의 권위와 사법권 독립의 힘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그들의 권한이나 돈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소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 쌓은 국민에 의한 신뢰에 바탕을 둔 지지에 달려 있다.이 점을 사법관료주의에 찌든 사법관료의 머리로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이 아무리 사법권의 독립을 그럴듯하게 규정해도 국민의 신뢰가 없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워진 도깨집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한상범, ‘화 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 인물과 사상28권) 다가오는 공판에서는 각성된 법관들의 판결을 기대하며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 더불어 근래에 지병인 천식으로 고통을 겪고 계신 송두율 교수의 건강도 빠른 쾌유를 빈다./사회부기자 |
# by | 2007/07/09 20:32 | 사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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