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황장엽, 에미넴, 그리고 문화적 차이

송두율, 황장엽, 에미넴, 그리고 문화적 차이
한국의 율사들이여 오만한 사법관료주의에서 깨어나라!
 
황진태
 

에미넴의 국적이 한국이었다면

얼마 전 미국 힙합가수인 에미넴이 “난 죽은 대통령들 때문에 노래하진 않아. 차라리 대통령이 죽는 것을 보았으면 해”라는 가사가 포함된 미발표곡이 인터넷상에 유포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백악관이 물론 한 줌의 뇌만을 갖고 있는 백악기 공룡들만 살고 있는 것은 아닐 터. 대통령 비서실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 중이란다. 하지만 이후의 외신을 접했을 때 에미넴에게 사법적인 잣대를 드리 내밀고 있지는 않은 거 같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일까?

▲에미넴  
하긴 미국에서 에미넴은 지 에미마저 씹는 노래(소위 DISS장르)를 앨범에 수록하고, 그 에미가 도로 지 자식인 에미넴을 씹는 앨범을 발매하는 모범적인(?) 자본주의가 작동되는 사회이니. 한국과의 기계적 비교는 무리일 수 있겠다. 만약 한국의 경우였으면 어떠했을까? 쉽게 추리가 가능하듯이 ‘국가 변란을 선동’한 죄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가수인생 종치고 구속되었을 터다.

자본주의에 포섭된 국가보안법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작동되는 한국산 자본주의가 미국과의 기계적인 비교 속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보다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음 사례에서 보듯이 오산일 수도 있겠다.

얼마 전 황장엽 씨가 출판기념회를 갖었다. 이념으로 본다면 극좌파 황장엽의 손님으로 예상되는 ‘주사파’는 경찰들의 감시 때문에 참석이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보수층을 이루는 인사들이 참석한다는 것은 납득이 안가는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참석한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은 먼저 눈에 띠는 게 김영삼 前대통령이고(이 양반의 언론플레이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개념이 없으신 분, 여기서 더 언급할 가치 없겠다.) 다음으로 왕년의 꼴보수 이철승 씨와 이종찬 前 안기부장, 김동길 前연세대 교수, 그리고 월간조선 편집장, 조갑제 씨까지 참석했다. 참으로 호화롭지 않은 가. 이들의 참석 명단만 가지고는 무슨 우익궐기대회를 하는 곳이 아닌지 헛갈릴 테다. 아직까지도 마르크스의 ‘마’자만 붙더라도, 자본론의 ‘자’자만 보이면 국보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요즘이거늘 극좌이념인 주체사상을 만들었던 저자의 새로운 책을 국보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서울 시내 한복판(세종로)에서 출판회를 하는 이 이중잣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가. 이는 대통령을 죽인다는 노래가 유포되는 미국의 자본주의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한수 위(?)임을 의미하는 것인가.

송두율 교수를 사례를 보건 데 이 상황은 아무래도 ‘극과 극은 통한다’는 평범한 명제를 통하여 이해될 수 있겠다. 즉, 황장엽이 극구 주장하는 송두율은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극좌적 포지션보다는 사실은 ‘경계인’으로 극좌도 극우도 아닌 그의 애매모호한 포지션이 극좌인 황장엽에게 눈엣가시이며 극우인 조갑제의 눈에도 눈엣가시로 박힌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통일연대 민경우 사무처장의 구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히려 엉뚱하게 보수 성향의 시민단체를 향해서 칼날을 겨누고 있으며, 정작 ‘빨갱이’를 잡기는커녕 빨갱이를 보호하는 ‘빨갱이보안법’이다. 이러한 논리의 오류를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한국사회를 너무 좋게 보았던 송두율 교수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송교수     ©대자보
송 교수가 귀국직후에 한 학술심포지엄의 기조 발제가 예정되었다가 ‘몸사리’는 주체측에 의해서 발제가 취소되어 송 교수는 결국 심포지엄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의 짧은 논문만이 남겨졌다. ‘한국민주화운동-과연 성공적이었는가?’라는 그의 논문에서 그는 “<민주화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던 세력이 많이 <참여정부>에 참여했지만 수적으로도 열세이고 비판과 저항에서 긍정과 참여가 요구하는 내용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녹색당의 사례를 언급하며 참여정부에 대해서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을 깔았었다. 이 논문이 귀국직후에 발제 예정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아무래도 독일에서 논문을 완성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송 교수의 낙관은 상당한 오판이었음을 중세 수준의 여론재판과 구속상태 있는 자신을 통해서 체감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시행착오”에 자신이 속한다는 것을 예상한 거라 봐야 할까?

그나마 다음과 같이 한국사회가 “그물사회(network society)는 비록 아니지만, 적어도 통합적인 <국가>와 경쟁적인 <시장>사이에서 <제3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된 사회>”라고 보고 있는 시민사회에 대한 송교수의 낙관은 옳았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극우꼴통 시민단체마저 ‘조직된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송교수의 지난 첫 공판 때 재판정에 보수꼴통단체 회원들이 자리를 차지하여 송교수를 응원하러 온 상식적인 시민들은 정작 자리에 착석조차 못했던 일화에서 보듯이 그들의 ‘조직됨’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도 민주주의라면 긍정해야 할 것이라면 할 말은 없다. 실로 웃기는 짜장들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율사들의 일제침략기 일제법령 체험 

한국법학교수회 명예회장이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인 한상범 씨는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일단 대대적 법제개혁이 단행되었고 민주화의 이론작업도 어느 정도는 수순을 거쳤”던 반면에 정작 한국에선 “1948년 제정된 헌법100조는 구법령(일제법령과 미국의 군정법령)의 효력을 보장하는 근거 규정으로 헌법이나 정부조직법 이외에 민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주요 법령이 존속되고 미군정하의 친일관료도 대한민국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전체주의 습속의 망령이 깃든 법령을 패전 직후에 쫓았던 반면 한국은 아직까지도 일제의 패망 전 시대의 법령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이 국가보안법으로 이름만 바뀌고 조항이 더 들어 간 사실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법이란 것은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그 무엇으로 '신(神)'마냥 아우라를 씌워버렸다. 이는 법전을 한문으로써 그들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려 했던 친일파 출신의 ‘법기술자’들이 큰 몫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들의 권력정당성은 뿌리가 없고 오로지 억압과 통제만이 그들의 불안정한 권력정당성을 유지시켜줬다. 그리고 그 토대는 물론 국가보안법이리라.

한상범 위원장은 이러한 국보법을 필두로 한 억압과 통제가 원인이 되어 한국인들의 성숙치 못한 법문화 의식의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며 “법치와 민주가 살아 있고 국민이 법제를 내 것으로 활용하는 수준의 법문화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법은 위에 있는 높으신 분들이 만들어야 한다는 관념이 박혀있었던 시민들에게 “법제를 내 것으로”라는 문구는 생경할 수밖에 없다. 이어서 그는 “국민에게 법의 보호를 제공하지 못하는 체제, 국민이 법의 보호를 받는 장치를 가동할 수 없는 엉성한 체제를 그대로 두고선 미래의 희망이 없다.”며 이 “엉성한 체제”인 국보법을 비롯한 일제, 독재시절의 잔재 청산을 다시 한번 강하게 피력한다.

에미넴과 송두율, 문제는 문화적 차이다

서두에서 에미넴의 사례를 통해서 ‘문화적 차이’에 대하여 언급했다. 이러한 문화의 범주에는 ‘법문화적인 차이’도 포함된다. 우리가 아무리 미국의 외교정책에 딴지를 걸고 반미를 외치지만 미국 내에는 ‘국민이 통제하지 않으며 어떤 정부도 계속 좋은 일을 할 수 없다.’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등의 유명한 명언을 남겼으며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이기도 한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성숙된 자유민주주의가 시민사회에 내재해 있다.(이 또한 미국이 ‘상대적’으로 한국보다야 낫다는 말이지 부시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아웃사이더 16호에 실린 김동춘 교수의 ‘미국의 미디어와 지식인’이란 글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이 결코 민주주의의 그 ‘이상적인’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토머스 제퍼슨도 흑인과 원주민을 시민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은 논쟁적인 쟁점이 있다.)

12월 16일 화요일, 송 교수의 두번째 공판이 있다. 한국의 율사들이여. 당신들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오만한 사법관료주의와 구법규로부터 탈피하여 송교수 사건에 임하길 바란다. 기자는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라서 한상범 위원장이 당신들에게 하는 충고로 이글의 마무리를 짓는 것이 나을 거라 본다.

“우리의 사법개혁은 특히 법조 양성 면에서 이 인권과 저항권부터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교육을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이다.법관의 권위와 사법권 독립의 힘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그들의 권한이나 돈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평소의 공정한 재판을 통해 쌓은 국민에 의한 신뢰에 바탕을 둔 지지에 달려 있다.이 점을 사법관료주의에 찌든 사법관료의 머리로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헌법이 아무리 사법권의 독립을 그럴듯하게 규정해도 국민의 신뢰가 없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세워진 도깨집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한상범, ‘화 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 인물과 사상28권)

다가오는 공판에서는 각성된 법관들의 판결을 기대하며 좋은 결과가 나오길 바란다. 더불어 근래에 지병인 천식으로 고통을 겪고 계신 송두율 교수의 건강도 빠른 쾌유를 빈다./사회부기자   

by 샤방샤방 | 2007/07/09 20:32 | 사회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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